지난 9월 둘째 주일부터 지난 주일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가시는 긴 여정을 통해 마르코가 도전하는 제자도를 들어 왔습니다. 마르코가 이 긴 여정의 결론으로 제시한 인물은 지난 주일에 본 거지 소경이었습니다.
“겉옷을 벗어버리고 일어나”, 주님의 부르심에 옛 생활을 떨쳐 버리고 예수님 앞에 나가 엎드리는 소경! “내가 보기를 원하나이다”, ‘중심을 보기 원한다. 높은 곳을 보기 원한다’는 단어를 사용하며 ‘하느님 나라를 보기 원한다.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원한다’는 고백을 드리며, “소경은 눈을 뜨고 예수를 따라 나섰다.”, 하느님 나라를 일구어 가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된 소경!
제자도를 강조하는 마르코는 오늘 복음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원칙을 제시합니다.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님께 “모든 계명 중에 어느 것이 첫째가는 계명입니까?” 질문했습니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는 계명이 무엇인가라는 주제는 율법학자들 사이에 빈번하게 논의되던 대표적인 화두였습니다. 하느님이 주신 율법 가운데 최고의 법, 즉 헌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사랑이 모든 것을 우선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1독서 신명기의 말씀을 인용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을 첫 번째 계명으로,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는 것을 두 번째 계명을 제시하셨습니다. 이것을 예수 신경이라고 합니다.
신경이라는 말은 ‘척도’, ‘기준’이라는 말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정리한 것이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이듯이, 예수 신경은 그리스도인이 살아야 하는 삶의 기준입니다. 아니 모든 인간이 살아야 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항상 예수 신경을 살아가셨습니다. 하느님을 뜨겁게 사랑하시어 언제나 기도 가운데 아버지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셨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사셨습니다.
아버지가 부어주시는 사랑으로 병자와 죄인들을 환대하시며 그들의 친구가 되셨고 마침내 아버지의 뜻에 따라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자기 목숨을 몸값을 바치셨습니다. 오늘 2독서는 이것을 증거합니다. 히브 9:12, “그리스도는 단 한 번 지성소에 들어가셔서 염소나 송아지의 피가 아닌 당신 자신의 피로써 우리에게 영원히 속죄 받을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이 삶으로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임을 보여주는 기독교의 상징입니다.
하느님을 마음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사랑하라는 말은 그 누구보다 그 무엇보다 하느님을 전심으로 사랑하라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느님을 사랑할 때만 만족과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을 사랑하게 됩니다. 쾌락, 명예, 권력,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는 재물에 집착하면서 하느님 없는 영혼의 빈자리를 채우려고 합니다.
쾌락 명예 권력 재물 모두 하느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지만, 하느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내 인생의 주인 노릇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우상숭배인 것이죠.
이것이 심하면 중독현상으로 나타납니다. 알콜 중독, 게임 중독, 니코틴 중독, 섹스 중독, 일 중독, 등등. 그리고 무엇보다 오로지 돈을 최고로 여기는 맘몬니즘으로 살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렇게 경고하셨습니다. 마태 6:24,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어거스틴의 고백이 생각납니다. “오 주님, 한줌 흙에 지나지 않는 피조물이오나 입술을 열어 당신에게 찬양을 드립니다. 당신에게 찬양을 드릴 때에 우리에게 기쁨이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위한 존재로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을 발견하기까지 평화를 누릴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이 여러분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를 위해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창조하신 하느님은 변치 않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스바니야 3장 17절 말씀입니다. 개역개정으로 읽어드립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이 사랑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크든 작든 열등감이나 교만 가운데 살게 됩니다. 어느 동네, 어떤 브랜드, 몇 평의 집에 사는지, 어느 차를 모는지, 학벌이나 스팩이 어떤 지로 사람을 평가하는 시대에 명품백이나 명품 시계로 자신을 포장하고 자신을 어필하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가치를 거스르는 세속적인 시대에 어떻게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에 자긍심을 갖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 하느님의 아들로 믿으니까 대단한 분으로 생각합니다만, 당대에서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뭐 선한 것이 나오겠냐고 업신여김 받던 분입니다.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고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리며 출생의 비밀까지 의심받고 놀림 받던 분이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고 하느님의 소명에 눈을 뜨고 하느님의 성령을 받으니까,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고 일구어 가는 위대한 삶을 사셨고 마침내 온 인류를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심으로, 하느님은 모든 이름 위에 가장 뛰어난 이름, 존귀한 이름 예수가 되게 하셨습니다.
부모와 깊은 애착 관계를 형성하고 친밀한 관계 가운데 자란 아이들이 자존감이 높은 것처럼, 하느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는 만큼 세상을 이기는 당당한 존재가 됩니다.
하느님과의 애착관계는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면서 시작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친히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시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그 사랑을 확증하셨습니다.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5:8,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 많은 인간을 위하여 죽으셨습니다. 이리하여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당신의 사랑을 확실히 보여 주셨습니다.”
이 사랑을 알면, 나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연약하고 부족한 죄인인 나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주시고 하느님의 자녀 삼아 주신 그 사랑으로 내가 나를 받아들이고 나를 보내신 주님의 소명을 발견하게 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 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이웃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나를 사랑하지 못하면 이웃과의 관계는 이해타산을 따지는 계산적인 관계가 됩니다. 내가 힘이 있으면 갑질을 하고 내가 힘이 없으면 비굴해 집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면 그 사랑으로 이웃을 섬기는 사랑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위대함입니다.
하지만, “인류를 사랑할 수는 있지만, 옆에 있는 사람을 사랑하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듯이 매일 일상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직장 동료, 가족, 교회 지체들을 사랑하는 일이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교회는 이 사랑을 경험하고 연습하는 사랑의 학교입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며 세상을 향해 사랑을 흘러 보내는 하느님 나라 공동체가 교회입니다.
아울러 주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웃 사랑의 생각을 확장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신경이 나오는 루가복음을 보면, 율법학자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는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이냐’고 묻습니다. 이에 예수님이 비유를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반쯤 죽게 되었는데, 사제도 레위인도 그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 간호해 준 다음,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고 간호를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일을 다 보고 돌아와 지불하겠다고 합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라고 하지요. 이 비유를 들은 사람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나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내가 사랑해야 하는 이웃이 누구인지, 이웃 사랑을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이 시대 강도 만난 사람들을 측은히 여기며 그들 곁으로 다가가고 그들을 싸매주고 자기의 시간과 물질을 들여 그들을 치유해 주는 사랑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시대 강도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난민, 소수자, 장애우들, 가난한 사람들, 실업자들, 특히 코로나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 등등.
훈훈한 이야기를 하나 전합니다. 마틴 교우님의 아드님들이 교회위원으로 섬기는 성남교회이야기입니다. 지난 9월 관구에서 미얀마 성공회를 통해 미얀마의 가난한 가정 100가정을 돕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우리 교회도 재난지원금의 십일조로 섬기자고 하여 250여만원을 봉헌했습니다만... 성남교회는 교회의 전 가정이 한 가정씩 입양하자고 결의하여, 성남교회 22가정이 미얀마 28가정을 입양했고 신자회장님이 지역의 가게 사장님들에게 홍보하여 6가정이 미얀마 7가정을 입양하여 총 28가정이 35가정을 입양하는 그러니까 35가정 * 36만원 총 1260만원을 봉헌했다고 합니다.
다음 주일이 추수감사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절기헌금의 반이나 1/3을 선교구제를 위해서 나누고 있습니다. 2018년부터는 추수감사주일 절기헌금을 가난한 성직후보생들의 장학금으로 봉헌하고 있습니다. 올 해도 그런 목적으로 사용하고 또 긴급 지원이 필요한 사람들을 돕는 일에 쓰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드리고 있는 감사성찬예배를 통해, 십자가의 사랑이 우리 안에 흘러 넘쳐 내가 얼마나 존귀한 하느님의 자녀인지를 알게 되고 그 사랑으로 서로 섬기며 이 땅에 강도만난 이웃들을 섬기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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