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백신 접종률이 올라가면서 확산세도 좀 주춤해지고 있습니다. 11월 둘째 주일부터 단계적으로 일상을 회복해 간다고 하니, 조금만 더 인내하고 방역에 적극 협조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배 뒤 광고 시간에는 일본 고베 총영사로 떠나시는 양기호 베드로 교우의 인사가 있습니다. 나라를 위한 귀한 사역을 잘 감당하시도록 기도바랍니다.
암이 재발해 지난 2일 입원하시어 검사를 받으신 주면선 모세 교우님 진단 결과가 오늘 나온다고 하는데, 주님께서 이후 치료과정으로 인도해 주시고 힘주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윤영석 스테파노, 김민정 도미니카 교우의 딸 윤시아 아기가 오늘 입원해서 내일 검사 받고 모레 19일에 수술을 하게 됩니다. 수술이 잘 되어 건강하게 자라나도록 기도 부탁드립니다.
날씨가 많이 쌀쌀하네요. 건강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세 번째 수난 예고 직후에 일어난 사건의 기록입니다. 야고보 요한 형제가 예수님께 와서는 높은 자리에 앉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을 보면, 야고보 요한의 어머니가 와서 청탁했다고 기록합니다. 기록된 인류 최초의 치맛바람입니다.
예수님은 38절에서 “너희가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냐”고 “내가 마실 잔과 고난의 세례를 너희도 마실 수 있냐”고 반문하십니다. 잔과 세례는 십자가의 죽음을 말합니다.
인류을 구원하시고자 죽으러 오신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이유를 세 번이나 말씀하셨는데도 여전히 제자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예고 후에는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 멱살잡이를 했습니다. 두 번째 예고 후에는 길에서 제자들이 누가 제일 높은 자리를 차기할 거냐로 싸웠습니다. 세 번째 수난예고 후에는 오늘 야고보 요한이 노골적으로 자신들을 가장 높은 자리에 앉혀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41절을 보면 다른 10제자가가 이런 야고보 요한을 보고 화를 냈다고 합니다. 같은 욕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제자들의 모습이 어이가 없습니다만, 정직하게 우리들의 모습을 돌아보면 별반 다르지도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들도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높은 자리, 성공, 명예, 권력, 부귀, 건강 등등만을 구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오늘 시편에서는 “나의 이름을 아는 자를 높여주겠다”고도 말씀하십니다. 이름은 인격과 성품, 언약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내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며 다 들어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상징되는 주님의 성품,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우리들은 주님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욕망을 투사한 소원 성취를 위하여, 문제 해결을 위해서 하느님께 쏟아 놓고는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한다고 기도를 마칩니다.
오늘 2독서 히브리서 5장 7절에 나오듯이, 게쎄마니 동산에서 큰 소리와 눈물로 간구하신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하고 기도를 마치셨습니다. 우리의 기도도 이러기를 바랍니다. 다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어도 모든 것은 주님의 은총 안에 있으며, 하느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좋은 결과를 이루시는 신실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욕망을 따라 소원을 비는 야고보 요한을 향해 예수님은 그 어떤 꾸지람도 하지 않으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39절, “너희도 내가 마실 잔을 마시고 내가 받을 고난의 세례를 받기는 할 것이다.”
이 말씀대로 야고보는 사도 가운데 첫 순교자가 되었습니다. 요한은 마지막 순교자가 되었구요. 제자들 모두가 순교자가 됩니다.
자신의 욕망을 쫓아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어떻게 하느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바치는 사람들로 변화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은 12제자를 가까이 불러 가르치셨습니다. 42절, “너희도 알다시피 이방인들의 통치자로 자처하는 사람들은 백성을 강제로 지배하고 또 높은 사람들은 백성을 권력으로 내리누른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제국이나, 맘몬이 다스리는 지금이나, 정도와 양상은 달라졌어도 세상은 힘과 권력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는 피라미드체제입니다.
예수님은 단호하게 43절,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말씀하십니다. 자주 말씀 드리지만, 하느님 나라 복음 공동체인 교회는 세상과 대조되는, 세상에 대항하는, 세상의 대안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3절, “너희 사이에서 누구든지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44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제자도, 그리스도인이 삶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가장 낮은 종은 예수님이고 그 다음이 누구? 주교님, 그 다음은? 사제, 그 다음은 신자회장과 사제회장, 신자사역자들과 교회위원 등 섬김이들이 됩니다.
이런 교회가 세상과 다른 UPSIDE DOWN KINGDOM, 역 피라미드 질서로 하느님의 나라를 경험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됩니다.
이렇게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세우시고자 예수님은 친히 모범이 되셨습니다. 45절,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하셨다.”
이 말씀에서 “몸값”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원어로는 ‘뤼트론’, ‘석방금 price of release, 대속물 ransom, 속전 ransom price’이라는 뜻입니다. 개역개정성경에서는 “대속물”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두 주 전 설교를 통해 “대속”이라는 말의 기원이 어디라고 말씀드렸는데 기억하시나요? 희년법입니다. “되돌려 주기” 위해서 “무르기”를 하는 것이 대속입니다. 무르기를 해주는 사람을? “고엘”이라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룻기에 나오는 보아스입니다.
보아스는 나오미의 기업무를 자, 고엘이 되어 나오미 가문의 토지를 사서, 즉 무르기해서 되돌려 주었고, 룻과 결혼하여 오벳을 낳아 나오미의 아들이 되게 해 주었습니다.
“무르기”를 통해 “되돌려 주는” 희년법은 이스라엘 살아있던 하느님 나라의 법이었고 예수님은 희년의 정신으로 자신의 죽음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무시하거나 하느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과 욕망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를 오늘 1독서에서 이사야가 리얼하게 표현합니다. 53:6,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하느님을 향한 자기중심의 태도와 자세! 이것을 성서는 죄라고 말합니다.
죄는 하느님과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이사야 59:2, “너희가 악해서 너희와 하느님 사이가 갈라진 것이다. 너희가 잘못해서 하느님의 얼굴을 가려 너희 청을 들으실 수 없게 된 것이다.”
하느님과 단절된 상태를 영적인 죽음이라고 합니다. 죄의 결과가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과 인간을 단절시키는 인간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오늘 1독서가 이를 말해 줍니다. 이사 53:5-6, “5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6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
예수님의 고난은 우리의 반역과 악행 때문에 우리를 위해 대신 당하신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죽어 마땅한 우리를 대신하여 당하신 고난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희생 제물로 받으시며 하느님을 무시하고 거역하며 살아가는 모든 인간의 죄를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오늘 2독서 히브리서는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신하는 희생제물로 자신의 생명을 바치신 희생제물이심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히브 10:12,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오직 한 번 희생제물로 바치심으로써 죄를 없애주셨습니다. 이것은 영원한 효력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오늘 2독서 히브리서 5장 9절, “예수님이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다”는 말이 이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으로 하느님과 우리 사이를 가로 막는 죄는 사라졌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죄의 값을 대신 치르는 우리의 기업 무를 자, 고엘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 대속은 그분의 삶에서 보여주신 사랑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병자의 친구로 지내셨습니다. 예수님은 늘 죄인들과 밥상공동체를 이루셨습니다. 밥상을 마주함은 그를 나와 동급이상으로 환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을 하느님의 자녀로 받아들이실 때마다 그들에게 덧 씌어져 있던 죄가 예수님에게 전이 되었습니다. 병은 죄의 결과라고 여겼던 유다사회에서 병자를 향해 “네 죄가 용서받았다”고 선포하시며 치유하실 때마다 그들에게 덧 씌워진 죄는 예수에게로 옮겨졌습니다.
정결법과 안식일법으로 대표되는 율법을 이데올로기화하여 사람들을 정죄하고 차별하는 유대 사회에서 그들을 하느님의 자녀로 인정하고 환대할 때마다 예수님은 점점 기득권자들에게 불순한 사람으로 여겨지면서 로마의 정치범 처형 틀인 십자가로 내 몰리게 된 것입니다.
설교 앞부분에서 자기 욕망의 실현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이 어떻게 순교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했었습니다. 이제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을까요?
숭고한 사랑의 결과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은 자신이 세 번이나 예언한 대로 부활하셨습니다. 다시 사시지 않았다면 성인으로만 기억되었겠지만, 부활하시어 모든 이들을 구원하는 구원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사랑으로 섬기시다 고난당하신 그 죽음이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한 대속의 죽음임을 하느님께서 확증한 것입니다.
이에 제자들은 부활과 영생의 믿음으로, 그들이 직접 보고 배운 예수님의 삶을 따라 살면서 하느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질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부르심도 십자가로의 부르심입니다. 자기 목숨을 바쳐 대속물이 되어 주는 사랑의 삶이 십자가의 영성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감사성찬예배의 여러 다른 이름들이 있습니다. Lord's Supper - 주의 만찬, Holy Communion - 거룩한 상통, Mass “ite, missa est” - 미사, Divine Liturgy - 거룩한 전례, 그리고 Great Offering - 대봉헌이라고 합니다.
“대봉헌”이라고 부르는 것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희생을 기억하고 찬양과 감사를 드리며, 우리의 삶을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하는 산제사로 드려야 함을 강조합니다.
오늘 3가지 표현, 단어에 주목해 보았습니다.
“너희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느냐?”
- 예수님이 보여주신 간절한 기도, 게쎄마니 동산의 고백,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을 배우기 바랍니다.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 사랑의 섬김으로 종이 되어, 세상과 대조가 되고 대항하며 대안이 되는 복음 공동체를 세워가기 원합니다.
욕망을 따라 제국의 가치와 질서를 따르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바치신” 예수님을 더 사랑하며, 그 분이 주시는 사랑으로 충만하여 내가 생명처럼 여기는 것들로 섬김을 다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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