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26일 모든 한국인 순교자의 날
오늘은 교회력으로 ‘모든 한국인의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순교란 자신이 믿는 신앙을 지키고자 기꺼이 죽음을 선택하는 것으로, 이렇게 죽은 사람을 순교자라고 부릅니다.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이 땅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하느님 나라 공동체인 교회를 세우다가 죽임 당한 천주교, 개신교, 성공회의 모든 순교자들을 기념하며 주님께 의탁하고 그들의 신앙을 본받는 우리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240여 년 전 한국에 들어온 천주교나 140여 년에 들어온 개신교 모두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습니다. 한국 선교의 역사가 순교자의 피로 얼룩져 있듯이, 선교 131년을 맞이한 대한성공회의 역사에도 수많은 신앙의 선조들의 헌신과 희생이 깃들여 있습니다.
일제 시대에 알려지지 않은 익명의 순교자들이 다수 계십니다. 특히 1950년 한국전쟁이라는 민족상잔의 비극 속에서 신자들과 고통을 겪으며 순교하신 분들이 계십니다.
신앙과 교회를 지키려는 고난 속에서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고귀한 생명을 하느님께 바쳐야 했습니다.
서울주교좌성당 성십자가 채플이 있는 남쪽 수랑 벽에는 한국전쟁 중 순교하신 분들 중에 이원창 신부, 윤달용 신부, 조용호 신부, 이도암 신부(영국), 홍갈로 신부(영국), 마리아 클라라 수녀(아일랜드) 등 여섯 분의 사진이 걸려 있습니다.
이원창 미카엘 신부
평양교회 관할사제로, 교회를 지키기 위해 남쪽으로 피난하지 않고 끝까지 남았으나 이후 생사가 확인되지 않습니다.
윤달용 모세 신부
서울주교좌성당 관할사제로 교회를 지키기 위해 피난하지 않고 성당에 남아계시다가 납치 당일인 7월 18일에도 감사성찬례를 드리셨다고 합니다. 인민군의 무자비한 양민학살에 항의했다는 이유로 8월 21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는 기록만 전해질 뿐, 이후 생사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교회 윤지상 요한 교우의 할아버지가 되십니다.
조용호 디모데 신부
1930년부터 32년까지 동경 릿쿄대학에서 유학하고 돌아오셔서 사목하시다가, 1930년 일제가 강제 폐교한 신학교가 1949년에 다시 개교할 때 교수가 되었고,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주교 보좌역을 담당했습니다. 1950년 7월 24일 납치되어 일주일 후 서울로 이송되었는데 생사를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윌리엄리 이도암(영국 선교사) 신부
1920년 내한하여 30년간 신학 교육을 위해 헌신했고 7월 25일 인천에서 인민군에 의해 납치 될 때도 신학원장으로 일하다가 일주일 후 서울 이송된 후 생사를 확인할 수 없습니다.
찰스 헌트 홍갈로(영국 선교사) 신부
1915년 한국에 와서, 1941년부터 45년까지 추방되었으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선교에 헌신하셨습니다. 총감사제로 서울을 지키다가 북송포로행렬에 끌려가 중강진 부근 해창리에서 11월 20일 별세했다고 합니다.
마리아 클라라 수녀
아일랜드 출신으로 1923년 영국 성베드로 수녀회에서 파견 받아 한국에 오셨고, 수녀회의 성장을 위해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남아 계시다가 1950년 7월 31일 천주교의 프랑스 출신 수녀님들과 함께 납북되어 혹독한 추위와 기아로 11월 6일 중강진에서 별세하셨다고 합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우셨을까요? 무엇이 이들을 이 고통을 겪게 했을까요?
이 모든 순교자들이 하느님의 품에서 안식하고 계실 줄로 믿습니다.
이제 역사를 고증하면서 잊혀진 순교자들을 찾고, 그들을 기념하면서 순교자들의 신앙을 계승하여 순교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과제가 우리에게 남아 있습니다.
오늘 읽은 성서 말씀들을 통해 ‘순교의 영성’은 무엇이고 어떻게 그 믿음을 살아갈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2021년 올 해는 마르코복음을 읽는 해인데, 오늘은 ‘모든 한국인의 순교자의 날’이어서 요한복음을 읽었습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두 주 전부터 필립보의 가이사리아를 출발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십자가의 길이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복음 본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의 종착지가 되는 예루살렘에 올라와 하신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에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12장 24절, “밀알 하나가 땅에 떨여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몸소 십자가의 길을 끝가지 걸어가심으로, 스스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죽으신 예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가을 햇살 아래 익어가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벼들을 보면,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어야만 열매를 맺는 생명의 신비’, ‘십자가와 부활의 신비’를 생각하게 됩니다.
씨앗이 땅 속에 뿌려져 적당한 시간이 지나면 썩기 시작합니다. 썩는다는 것은 땅 속의 미생물들이 씨앗을 먹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미생물들이 씨앗 속에 있는 씨눈만은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시간이 흘러 씨앗을 먹은 미생물들이 배설물을 내놓게 되면, 씨눈은 그 배설물을 섭취하면서 싹이 움트게 되고 뿌리를 내리게 됩니다.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신비인지요?
밀알이 죽는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남에게 먹이로 내어주는 자기 해체입니다. 이것이 피조물 안에 있는 창조주의 속성인 사랑입니다. 사랑은 자기 비하, 자기 해체, 낮아짐, 자기희생입니다.
인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엄마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기를 잉태하면서부터 자신을 또 다른 생명인 아기에게 내어주기 시작합니다. 아기가 출생하면 모든 정성을 다 쏟아 양육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1독서를 보면, 하느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알게 됩니다. 스바니아 3장 17절 말씀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 하시며 즐거이 부르며 기뻐 기뻐하시리라.”(개역)
아기를 키워보신 분들은 이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습니다. 나의 존재로 기뻐하시는 하느님! 하느님은 나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나의 이름을 부르시며 기뻐하십니다. 하느님의 이 사랑을 깨달아 아는 은총을 기도합니다.
이토록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시어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 말씀을 통해 하느님의 낮아지심, 성육신과 자기해체 자기희생, 십자가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자기 생명을 바치신 순교자들의 공통점은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만을 사랑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티베리아호수로 돌아가 고기를 잡던 베드로를 찾아가 묻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정말 나를 사랑하느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합니다. “저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이 아시는 바와 같이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을 다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제가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모르실 리가 없습니다.”
이렇게 대답한 베드로에게 주님은 “내 양들을 잘 돌아보아라.”고 부탁하셨고, 베드로는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으로 주님의 양 떼들인 교회를 돌보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했습니다.
앞서 살펴본 대한성공회 순교자들도 베드로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사랑하기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지키고, 하느님의 백성들을 돌보다가 순교했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에 나타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도 바울로는 오늘 서신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35절,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38절-39절, “38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생명도 천사들도 권세의 천신들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능력의 천신들도 39 높음도 깊음도 그 밖의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를 통하여 나타날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한 사도 바울로는 필립보서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1:21-24, “21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 22 그러나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서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을 택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23 나는 그 둘 사이에 끼여 있으나 마음 같아서는 이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고 싶습니다. 또 그 편이 훨씬 낫겠습니다. 24 그러나 여러분을 위해서는 내가 이 세상에 더 살아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빨리 죽어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고 싶다’고 말하는 바울로! 얼마나 예수님을 사랑하면 이렇게 고백할까요? 사도 바울로는 이 사랑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전도자로 살다가 순교했습니다.
순교의 영성이란 곧 주님을 향한, 그리고 주님의 교회를 위한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성찬례를 통해 자신을 기억하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희생을 기념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주님만을 사랑하여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일구어가는 제자가 되게 하심입니다.
감사성찬예배만 잘 드려도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주님을 향한 사랑이 깊어지는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예배는 생명입니다.
감사성찬예배는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말씀의 전례의 중심은 성서독서와 설교이고, 성찬의 전례의 핵심은 성찬기도입니다. 성찬기도 안에 복음의 핵심이 다 들어 있습니다.
성찬기도는 4개의 양식이 있습니다. 간편양식까지 하면 5개입니다만, 지난 7월부터 성찬기도를 2양식, 3양식, 4양식으로 바꿔가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다양한 표현으로 복음을 이해하고자 함입니다.
비록 비대면 영상예배로 성체와 보혈을 먹고 마시지 못할지라도, 성찬기도를 마음에 새기며 예배드릴 때, 성령님이 역사하시어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아 알고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이 굳건해집니다. 그럴 때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품고 순교의 영성으로 살아가는 제자로 세워질 것입니다.
잠시 묵상합시다. (30초)
“예수님, 주님의 사랑을 깊이 깨달아 알기 원합니다. 주님만을 사랑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한 알의 밀알이 되신 예수님을 따라 저도 작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 저를 낮추고 희생하면서 다른 생명이 태어나고 자라나는 생명의 신비에 동참하게 하소서.”
순교자의 마음을 표현한 찬양이 있어 부르고자 합니다. “멈출 수 없는 사랑 주소서”라는 찬양입니다.
“멈출 수 없는 사랑 주소서. 끊을 수 없는 사랑 주소서.
십자가의 달린 주님 계시니, 그 누가 이 사랑 끊으리.
멈출 수 없는 사랑 주소서. 끊을 수 없는 사랑 주소서.
주께서 주신 비전 그 말씀 있으니, 주가 명하신 이길 걸어가리.
주님의 나라 영원하며 주님의 영광 무궁하리
나그네 된 나의 삶 감사하리. 마음 다해 주님을 찬양해.
멈출 수 없는 사랑 내게 주소서. 아버지의 눈물 그 사랑을
끊을 수 없는 사랑 내게 주소서. 십자가에 달린 그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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