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9월 16일 연중 24주일 감사성찬례 설교문
최성모 요한 신부
+ 나의 바위, 나의 구원자이신 하느님,
제 생각과 제 말이 언제나 주님 마음에 들게 하소서.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오늘 복음서의 예수님 말씀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성서구절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기만의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란 말할 수 없이 무겁고 중요한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가 져야 할 십자가가 어떤 십자가여야 하는지에 대해선 두려운 마음이 먼저 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교우 여러분께서는 지금 어떤 십자가를 지고 계십니까? 그 십자가를 자신있게 지고 가실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면, 그 십자가가 나를 너무 무겁게 짓눌러서 힘들다고, 이제는 좀 벗어 내려놓고 싶다고 생각하십니까?
안타깝지만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짊어져야 할 십자가를 이스라엘의 율법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것은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인지를 깨달아 하느님을 알게 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귀한 율법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옥죄었고, 그렇게 그 의미마저 희미해지고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과 하나되는 자녀가 되지 못하게 하고, 오히려 그분 앞에 서지 못할 죄인으로 낙인 찍는데에, 단연코 율법은 무소불위의 힘이었습니다.
하느님을 잘 알게 하려는 율법을 오히려 하느님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는 수단으로 만들어버린 이 무서운 힘이 십자가에 이어졌습니다. 지난 이천 년 동안 교회의 역사 안에서 십자가는 수많은 그리스도인을 옥죄어왔고, 또한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으로 수많은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며 좌지우지 하려 했던 종교정치인, 종교권력자들을 비판하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이 억압받고 속박당할 그런 십자가를 지라고 하시진 않으셨을 것입니다.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는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먼저, 자기를 버리라는 말씀은 자기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 사람은 그 자체로 귀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가 서로 다른 생김새처럼 서로 다른 영혼을 가졌고, 지은 죄나 그 죄의 중함이 서로 다를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똑같이 그리고 특별히 사랑하심을 교우님들께서는 기억하셔야 합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지금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느님께서 받아주셨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를 버리라는 말씀을 자기를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하게 되면, 지금 자신이 실망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 모습을 스스로 받아들이지 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도 이미 그대로 받아주신 자신을 비하하고 싫어하고 거부하는 것이야말로 하느님의 사랑을 저버리는 일입니다. 더욱이 여기에 자기의 십자가를 진다는 의미까지 잘못 받아들인다면, 정말 그 사람은 자기를 사랑하지도 못할 뿐더러, 스스로를 학대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받아들이지도 못할 이상에 좌절하면서, 내가 그렇지 뭐, 나는 정말 안돼, 라는 말들로 자신을 할퀴는 것은 크나큰 죄입니다.
우리가 져야 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각자의 십자가 역시 그런 의미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위에서 숨을 거두셨기 때문에,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십자가란 예수님의 수난의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마저 고난, 고통, 금욕 등으로 고민없이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십자가는 수난의 십자가만이 아니라, 부활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수난의 십자가, 부활의 십자가, 영광의 십자가, 그 모두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을 제대로 느낄 수 있고, 잘 알 수 있게 한다는 사실을 또한 기억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고,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단지 고난, 고통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고통을 하느님이 주신 시험이라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오해하게 될 것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져야 할 십자가를 금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면, 하느님께서 주신 기쁨을 구원의 장애물, 죄의 올가미로 여기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각자 져야 할 십자가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복음서 말씀으로 돌아가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당신께서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분의 맏제자인 베드로는 “안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을 붙들고서 펄쩍펄쩍 뛰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런 베드로에게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한다며 크게 꾸짖으셨습니다.
바로 직전,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했던 베드로도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어떻게 해서든 피하고 싶었습니다. 정말 그런 건 생각조차 하고 싶지 않았고, 오직 꽃길만을 걷길 바라고 바랐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그런 생각이 하느님의 뜻과는 다르다고 말씀하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지셔야 하는 십자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고 그분의 뜻을 좇아 사셨던 예수님과의 분명한 차이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 우리에게 말씀하신 우리의 십자가는 모두 신실하신 하느님을 바라는 것입니다. 오직 그분의 뜻, 그분의 크신 계획, 그분의 놀라운 지혜를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그것을 알 수도 볼 수도 없지만, 오직 그분만을 신뢰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자리에 모인 우리 모두 마찬가지로 고난과 고통, 어려움과 두려움을 피하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 너무나도 간절해서,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보다도 더 강력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그 간절함을 위해 하느님을 소유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하느님은 무소부재하신 분이시다’ 말하면서도, 우리의 마음에서 바로 그런 분이 지금 내 곁에서 내 기도를 들어주셔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입으로는, ‘하느님은 자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분이시다’ 말하면서도, 바로 그런 분이 내 간절한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생각되는 순간, 그분을 무자비하고 무능력한 분으로 여기며 분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우리의 소원을, 우리의 기도를 늘 귀담아 들어주시고 이뤄주셔야 하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 가족, 친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모두가 항상 잘 되고 행복하게 해달라고 하느님을 이용할 수 없습니다. 나를 버린다는 것은 그렇게 하느님을 내 소유물로, 내 삶의 행복을 위해 이용하고자 하는, 바로 그 마음을 버리는 것입니다.
약한 우리는 어느 누구도 고난과 고통, 어려움과 두려움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안에 기쁨과 즐거움, 행복이 있듯, 그것은 그저 이 세상 안에 있을 뿐입니다. 하느님을 바란다는 것, 하느님의 뜻, 하느님의 크신 계획, 하느님의 놀라운 지혜를 구한다는 것은,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삶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고 응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기쁨과 즐거움, 행복 안에서 보다 쉽게 찾을 수 있겠지만, 어렵고 힘들어서 잘 찾을 수 없을 뿐, 고난과 고통 안에서도 분명 하느님의 사랑은 있습니다.
오늘은 성 니니안 축일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이렇듯 교회의 전통 안에서 성인을 기리고 공경하는 것은, 이 신앙의 선조들이 고난과 고통, 금욕의 십자가를 멋지게 짊어진 신앙의 모범생, 우등생들이라서가 아닙니다. 그분들이 성인이신 이유는, 삶의 모든 순간에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바로 그 신뢰로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된 삶을 충실히 살아내신, 참된 어머니이자 아버지, 딸과 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우 여러분, 자신을 버리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십시오. 하느님께 무엇을 바라기보다 오직 그분께 감사하는 삶을 사십시오. 교우님들을 지극히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분의 뜻대로, 그분의 크신 계획 안에서, 그분의 놀라운 지혜를 통해, 교우님들께 가장 좋은 것으로만 가득 채워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누리고 있는, 하느님께서 주신 이 귀한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그 삶 안에서 하느님께서 어떻게 교우님들을 인도하실지 설레는 마음으로 기대하십시오. 바로 이 설레임이야 말로, 신앙의 인내이고 기쁨의 원천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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