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8일
분당교회 설교 말씀 - 김장환 엘리야 신부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구심점, 성전!
청년회가 10명이 참여하여 어제부터 수련회 중입니다. 청년회 수련회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후원해 주신 교우들께 감사드립니다. 청년회와 주일학교 등 우리 다음 세대가 믿음 안에서 우뚝 서도록 지속적인 기도와 후원바랍니다.
아침에 단톡방에 올려드린 그림엽서의 “시린 바람이 불어오면, 가까이 더 가까이 서로의 온기를 나누라!” 글처럼, 예배와 애찬을 함께 하며 따스한 주님의 사랑과 서로 간의 우정이 우리를 가득 감싸는 은총의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 복음은 지난주일 복음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지난주일 복음을 기억하시는지요? 헌금궤 앞에 앉아 많은 돈을 헌금하는 부자와 렙톤 2개를 헌금한 과부를 바라보시며 하신 예수님의 말씀, “저 가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헌금궤에 넣었다. 다른 사람들은 넉넉한 데서 얼마를 넣었지만, 저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
이 말씀은 과부에 대한 칭찬이기보다는 하느님의 것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며 자기만족과 자기 의로 헌금하는 부자들을 향한 비판이며, 과부로 하여금 생활비를 다 털어 넣어 헌금하게 만드는 성전의 종교 권력을 향한 분노의 표현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으로 나오는 오늘 복음으로 이어지면서, 진정한 성전이 회복되기를 원하시는 주님의 마음을 엿보게 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성전을 나오실 때 제자들이 성전의 위용에 놀라 감탄했습니다. 감탄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보고 있는 웅장한 성전이 파괴되어 완전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야기는 성전 맞은편에 있는 올리브 산으로 이동해서 계속됩니다.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와 함께 성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언제 성전이 파괴되는 일이 일어날지 제자들은 궁금했습니다. 예수님은 가짜 그리스도들이 출현하고 전쟁이 일어나고 천재지변들이 빈번해지면 성전이 무너지는 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씀하셨습니다.
실제 예루살렘 성전은 70년 로마 장군 티두스가 항전하는 이스라엘을 공격하면서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 파괴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당대의 기록을 보면 자신이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전쟁도 잦았으며 천재지변도 일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난주일 복음에 가난한 과부가 등장하고 이어 성전 파괴의 예언이 기록된 이유를 생각해봅니다.
성서에서 고아와 함께 과부는 사회 경제적인 결핍의 상징이었습니다. 율법은 그들에 대한 사회경제적인 보호를 명령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고아와 과부를 괴롭게” 하면 하느님이 갚으신다고 했습니다. 출애 22:21-22, 과부와 고아를 괴롭히지 마라. 너희가 그들을 괴롭혀 그들이 나에게 울부짖어 호소하면, 나는 반드시 그 호소를 들어주리라.
하느님은 고와와 과부의 하느님이셨습니다. 신명 10:18,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세워주시고 떠도는 사람을 사랑하여 그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주시는 분이시다.
고아와 과부는 이스라엘공동체의 우선적인 보호대상 이었습니다. 신명26:12-13, 12 삼 년째 되는 해 곧 십일조를 바치는 해가 되면, 네 모든 소출에서 열의 하나를 떼내어 레위인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주고 그것을 너희 성 안에서 실컷 먹게 하여라. 13 그리고는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 아뢰어라. '주께서 분부하신 대로 거룩한 것을 집에서 모두 퍼내어 레위인과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주께서 분부하신 것을 잊지 않고 어김없이 다 행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말씀대로 살지 못하면서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는,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사회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공평과 정의가 무너졌습니다. 그러면서도 성전에 와서 예배드렸습니다.
원래 성전은 어떤 곳입니까? 죄 사함을 위한 제사를 드리고 죄 사함의 은총을 입어 다시 하느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는 이스라엘의 사회의 중심이었습니다. 죄란 창조주 하느님과 그분이 주시는 삶의 원칙을 무시하고 자기 탐욕을 만족시키고자 우상을 섬기는 불순종의 삶입니다.
하느님은 성전에 나와 죄를 고백하고 제물을 드리는 사람을 용서하시고 이스라엘에 공평과 정의 - 미슈팟, 쩨다카가 이루어지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가도록 하셨습니다. 이렇듯 성전은 하느님 나라의 중심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일상의 삶에서 공평과 정의를 행하지 않으면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사야 1:11-17, 11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이 많은 제물들을 나에게 바치느냐? 나 이제 숫양의 번제물에는 물렸고 살진 짐승의 기름기에는 지쳤다. 황소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는 보기도 싫다. 12 너희가 나를 보러오는데 도대체 누가 너희에게 내 집 뜰을 짓밟으라고 하더냐? 13 더 이상 헛된 제물을 가져오지 마라. 이제 제물 타는 냄새에는 구역질이 난다. 초하루와 안식일과 축제의 마감날에 모여서 하는 헛된 짓을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4 너희가 지키는 초하루 행사와 축제들이 나는 정말로 싫다. 귀찮다, 이제는 참지 못하겠구나. 15 두 손 모아 아무리 빌어보아라. 내가 보지 아니하리라. 빌고 또 빌어보아라.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너희의 손은 피투성이, 16 몸을 씻어 정결케 하여라. 내 앞에서 악한 행실을 버려라. 깨끗이 악에서 손을 떼어라. 17 착한 길을 익히고 바른 삶을 찾아라. 억눌린 자를 풀어주고, 고아의 인권을 찾아주며 과부를 두둔해 주어라."
삶이 뒷받침 되지 않는 예배는 하느님과 물질을 겸하여 섬기는 우상숭배일 뿐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바로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BC 587년경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2세에 의해서 성전까지 파괴되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바벨론을 도구로 삼으시어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심판의 목적은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을 하느님만을 섬기는 거룩한 백성으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의 포로로 70년을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페르시아 고레스왕을 통해 이스라엘을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바벨론 포로로부터의 귀환-이것을 제2의 출애굽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회복된 이스라엘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루살렘 성벽을 쌓고 성전을 건축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때 재건된 성전을 즈루빠벨 성전이라고 합니다. 느헤미야, 에즈라, 하깨서의 이야기가 이런 내용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영광이 가득한 성전을 꿈꾸고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 공평과 정의가 넘치는 하느님의 나라를 세워가는 하느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결의하고 고백했습니다. 하지만 다시 타락하고, 다시 심판을 받아,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에 의해서 즈루빠벨 성전이 파괴되었습니다.
헤로데 로마 총독
이후 로마총독 헤로데는 식민지 백성인 이스라엘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 웅장하고 화려하게 성전을 건축하였습니다. 지금 예수님이 바라보고 계신 성전은 로마의 총독 헤로데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건축한 헤롯 성전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율법대로 예배가 드려졌지만, 헤로데와 결탁한 성전계급들인 제사장과 율법학자들의 잇속을 채워주는 장사터로 타락한 성전입니다. 더 이상 하느님의 영광의 임재는 사라진 채 인간들의 세속적인 목적에 이용되는 웅장한 건물만 있는 성전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일을 기억하시죠? 마르코 11:15-17,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사고팔고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16 또 물건들을 나르느라고 성전 뜰을 질러다니는 것도 금하셨다. 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구나!" 하고 나무라셨다.
거짓된 예배가 드려지며 인간들의 세속적인 욕망만이 가득 찬 성전을 뒤 엎어버리신 예수님이 오늘 복음에서 그 성전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느끼게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마치 1독서의 한나의 마음과 같습니다.
아들이 없어 설움을 받던 한나는 이스라엘에 진실한 하느님의 아들이 없어 아파하는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됩니다. 아들을 주시면 하느님의 아들로 드리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예수님도 거룩한 삶이 없이 타락한 예배만을 드리는 이스라엘로 인해 슬퍼하시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그런 하느님의 백성을 세우고자 자신의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창조주 하느님, 절대 주권자이신 야훼 하느님은 미슈팟과 쩨다카를 실천하기 위해 애통하며 죄 사함의 은총을 구하는 예배를 원하시는데...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백성이 하느님의 영광만을 찬미하는 아름다운 성전의 예배를 받기를 원하셨는데...’ 이렇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성전을 바라보신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다시 세워질 참된 성전을 바라보셨을 것입니다.
이 비전으로 예수님은 십자가에 자신의 몸을 대속의 제물로 바치셨습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막혔던 휘장을 찢고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하느님 앞에 나가 하느님을 예배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모든 자로 거룩하고 순결한 삶을 살아가는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히브리 10:19-20,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예수께서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는 마음 놓고 지성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20 예수께서는 휘장을 뚫고 새로운 살길을 우리에게 열어주셨습니다. 그 휘장은 곧 그분의 육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탐욕으로 무너져 버린 성전을 보시면서 복음에 반응하는 하느님의 사람들에 의해서 회복될 새로운 성전 – 주님의 교회를 꿈꾸셨습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구약에서 하느님이 그토록 원하시는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진 곳이 바로 신약의 교회입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에 따른 의무나 자기 의가 아니라, 전부를 주신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여 전부를 드리는 봉헌으로 하느님의 공의 - 쩨데크가 이루었습니다. 사도 4:34-35, 34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35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바르지 않고 우리의 예배가 진실되지 않다면, 아무리 건물이 화려하고 웅장해도, 아무리 사람이 많이 모이고 큰 교회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전이 아니고 다 파괴되고 무너져야 하는 인간들의 욕망일 뿐입니다.
우리가 이 시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기 위해,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서로서로 격려하고 지지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히브리서는 이렇게 권면합니다. 히브리 10:24-25, 24 서로 격려해서 사랑과 좋은 일을 하도록 마음을 씁시다. 25 그리고 어떤 사람들처럼 같이 모이는 일을 폐지하지 말고 서로 격려해서 자주 모입시다. 더구나 그 날이 가까이 오는 것을 아는 이상 더욱 열심히 모이도록 합시다.
여러분 모두,
성전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을 깨달아 알고,
전심으로 하느님께 예배드리며,
공평과 정의를 행하는 거룩한 일상을 살아,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성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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