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추수감사주일
김장환 엘리야 신부
감사하는 삶,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삶!
지난 주간부터 우리 공동체는 깊은 슬픔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누구보다도 교회를 사랑하셨던 송준영(그레고리) 교우께서 우리 곁을 떠나가신 것입니다. 그레고리 교우님은 오래전부터 죽음을 준비하셨습니다. 우리들도 그 때가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급하게 올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도 차를 몰고 20여분 달려가면 그레고리 교우님이 수지집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시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고 예배드린 후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실감이 나지 않습니다. 아들 어거스틴이 뇌출혈로 쓰러진 후 내색하는 않으셨지만 얼마나 힘들어하셨을까요? 그레고리님이 겪으셨을 몸과 마음의 고통을 생각하면 눈물이 납니다. 어거스틴으로 인해, 그레고리님의 별세로 인해, 여전한 슬픔 가운데 있는 유족들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께서 힘주시길 기도드립니다.
그레고리님의 유해를 대성당 안식의 집에 모셨는데, 자리가 2달 반 전 우리 곁을 떠나가신 안토니오님 옆입니다. 지난 금요일 삼우성찬례를 드리고 안식의 집에 가서 환하게 웃고 계신 안토니오님의 사진과 중후한 신사의 품격을 하신 그레고리님 사진을 다시 보니, 울컥했습니다. 두 분 모두 하느님의 품에서 안식하고 계실 것이기에 위로를 얻습니다. 지난 금요일이 모든 별세자를 위한 날이었는데, 잠시 별세자들을 기억하며 기도하겠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여, 주님은 죽으심으로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모든 생명을 구하셨나이다. 당신의 종을 인자하신 주님의 손에 위탁하며 간절히 구하오니 주님 품 안에서 평안히 잠들었다가 마침내 주님의 형상으로 깨어나게 하소서. 이제 우리가 별세한 교우를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주님 안에서 편히 쉬게 하시며, 마지막 부활의 날에 주님의 빛나는 얼굴을 뵙게 하소서. 또한 별세한 교우로 인하여 슬퍼하는 이들을 위로하시고 자비를 베푸시고, 우리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을 깨닫고 지혜로운 마음을 얻어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사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이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을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드리는 추수감사주일예배에 아주 적합한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감사’가 하느님을 향한 사랑의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감사와 찬양의 제사를 드립니다. 오늘 시편을 보십시오. “감사기도 드리며 성문으로 들어가거라. 찬양 노래 부르며 뜰 안으로 들어가거라.” 그래서 우리 성공회에서는 예배의 이름을 ‘감사성찬례’라고 합니다. “우리 주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예배이고, 예배의 본질이 감사입니다.
그런데, 이런 예화가 있습니다.
<어느 날 하느님께서 두 천사를 세상에 내려 보내시며, ‘오늘 하루 동안 드려지는 사람들의 기도를 모아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은 각각 커다란 바구니를 한 개씩 들고 성도들이 기도하는 곳이면 어느 곳이든지 찾아다니며 사람들의 기도를 담았습니다. 저녁쯤 일을 마친 두 천사는 서로의 바구니를 들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한 천사의 바구니는 들고 가기 힘들만큼 무거웠지만, 다른 한 천사의 바구니는 들어있는 것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은 가벼운 바구니를 든 천사에게 어째서 바구니가 그렇게 가볍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 천사는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이것을 해 달라, 저것을 해 달라.’하는 기도만 드렸지, ‘이렇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래서 고맙습니다.’ 하는 감사의 기도는 별로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간구를 담은 저 친구의 바구니는 가득 찼지만, 감사를 담은 제 바구니는 이렇게 비어있습니다.”라고 대답하며 한숨을 쉬었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형식적이고 습관적이기에 이런 예화가 있는 것일까요? 이것이 하느님께서 감사절기를 지키라고 명령하신 이유입니다. 예배 가운데 하느님을 향한 진정한 감사가 드려지지 않기에, 감사 절기를 지키면서 다시 우리 안에 주님을 향한 감사의 마음을 회복하라는 것입니다. 잠시 후 성찬의 전례에서 드려지는 성찬기도문을 잘 들으시어 ‘하느님께 감사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 아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내게 주어진 것에 감사하는 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나의 외모, 성격, 환경, 처지 등등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내가 수용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 항상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강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입니다. 곧 감사하는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자족의 영성입니다. 그래서 추수감사주일을 맞이하면서 감사노트를 작성해 보도록 한 것입니다.
제가 매일 쓴 감사노트를 보니까, 하느님께 드린 감사의 내용이 크게 두 가지로 분류가 됩니다. 하나는 부족하고 연약한 제가 사제로 쓰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고단하고 외롭고 힘든 인생 여정을 살아가는 사람들 곁에서 같이 웃고 울며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는 통로가 되는 삶이 감사했습니다. 제가 사제됨은 전적인 주님의 은총입니다.
다른 하나는 일상의 소소한 삶입니다. 저는 아침에 성당에 와서 기도를 드립니다. 교회의 이런 저런 잡무를 처리합니다. 심방이나 면담을 하거나 신자교육, 성경공부로 하느님의 말씀을 나눕니다. 독서를 하고 성서연구와 묵상을 하며 설교 준비를 합니다. 하루를 마치면 가정으로 돌아가 사랑하는 아내와 저녁을 먹으며 수다 떨고 쉼을 갖습니다. 소확행이라고 하지요? 일상 가운데 작지만 확실한 행복을 누리는 삶에 감사드립니다.
“주신 것으로 감사합니다”라는 글이 있습니다.
<“하루 먹고 살기 위한 두 세끼 식사, 피곤한 몸이 잠잘 한두 평의 공간, 서로 돌보며 사랑을 나눌 몇 사람, 이 이상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더 있을까? 이런 것이 있다면 이런 것이 없어 고통 받는 이들도 있으니, 그냥 감사해야겠습니다. 그냥 주신 것들로 감사감사합니다.
이 이상 주신 것들은 아마도 없는 이들과 나누라고 주님이 잠시 맡기신 것이겠지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세상 떠날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일 텐데요. 우리는 아무 것도 가져가지 못하니 오직우리가 나누고 섬긴 것만 주님 앞으로 가져갈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그냥 감사하고 그냥 나누며 살다가 홀가분하게 주님께 날아가길 원합니다.”>
이 시간 두 분 씩 감사를 나누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한 사람당 2분씩 옆에 계신 분에게 자신이 감사노트에 쓴 내용을 나눠주시기 바랍니다. 2분마다 종을 치겠습니다.
셋째, 감사하는 사람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주보 2면에 박노해 시인이 쓴 ‘감사한 죄’라는 시가 실려 있습니다. 읽어보겠습니다.
<내 나이 팔십이 넘으니 오늘에야 내 숨은 죄가 보이기 시작하는구나. 거리에서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내 처지를 아는 단속반들이 나를 많이 봐주고 공사판 십장들이 몸 약한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파출부 일자리도 나는 끊이지 않았느니라.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에 감사만 하면서 긴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구나.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민주화 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내 새 끼 하면서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왔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묵주를 손에 쥐고 흐느끼신다. 감사한 죄, 감사한 죄, 아아 감사한 죄“>
시를 읽어보니 이기적인 감사를 돌아보게 됩니다. 앞서 읽은 “주신 것으로 감사합니다.”라는 글에서도 그랬는데, 진정한 감사는 어려운 이웃을 생각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영적으로 참되게 감사성찬예배를 드리며 일상 가운데 자족의 영성으로 사는 사람은 나보다 어려운 이웃을 돌아보고 나누고 섬기는 연대의 영성을 살게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삶과 이웃을 사랑하는 삶이 동전의 양면이기 때문입니다.
감사로 드리는 성찬예배가 세상 속으로 보내지는 파송으로 마치게 되는 이유입니다. “나가서 주님의 복음을 전합시다. 나가서 주님의 사랑을 나눕시다. 나가서 주님의 평화를 나눕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 하느님께 드리는 진정한 감사는 우리를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회적 약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으로 이끌어 줍니다.
그래서 추수절기를 명한 신명기 말씀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16:10-11, “10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복을 내려주신 만큼 마음에서 우러나는 대로 예물을 바치며 너희 하느님 야훼께 추수절 축제를 올려라. 11 그리고 너희 하느님 야훼를 모시고 그 앞에서 즐겨라. 너희는 아들과 딸뿐 아니라 남종과 여종, 또 너희와 한 성문 안에서 사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 있는 떠돌이, 고아, 과부까지도 데리고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고르신 곳에서 함께 즐겨라.”
우리 교회는 절기헌금의 일부를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에게 흘러 보내고 있습니다. 오늘 드리는 추수감사주일봉헌금은 가난한 성직후보생들을 위한 장학금으로 플로윙합니다. 성탄 절기헌금은 노숙인들, 예멘 난민들, 호스피스 사역 등에 흘러 보내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가 재정적으로 더 여유가 있다면 더 많은 분들에게 사랑을 흘러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운 가운데 정성을 다해 힘껏 봉헌하시는 교우 여러분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여러분 모두 더 많은 것들로 나누고 베푸는 축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정한 감사로 하느님께 예배드리고 하느님이 허락하신 것에 자족하며 가난하고 어려운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 행복입니다. 바로 이러한 삶이 천국에 가까운 삶이고 천국을 예비하는 삶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 행복을 누리는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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