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1일 연중 32주일
김장환 엘리야 신부
신앙은 청지기 삶!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성전에서 헌금궤 맞은편에 앉아 사람들이 헌금하는 것을 바라보고 계십니다. “바라보고 계셨다”는 것은 ‘관찰하셨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이 잘 보이는 곳에 앉으셔서 유심히 관찰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괴팍스럽기만 합니다.
이렇듯 복음서가 보여주는 예수님의 이미지는 우리가 생각하는 이미지와는 다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인자하고 온유하고 친절하신 분으로만 생각합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위선자들에게는 듣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로 책망 하십니다. 불의 앞에서는 분노하시고 화도 내십니다. “이 독사의 자식들아” 이렇게 욕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유심히 보고 있는데, 부자 여럿이 와서는 헌금을 합니다. 당시 화폐는 동전 밖에 없으니 헌금의 양을 소리로 가늠할 수 있습니다. 둔탁하고 묵직한 소리가 납니다. 부자들은 아마 고개를 뻣뻣이 들고 거들먹거리며 걸어갔을 것입니다. 뒤이어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은 와서 헌금을 합니다. 땡그랑, 땡그랑, 소리가 가장 작은 화폐인 렙톤 두 개입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치면 1000원 정도라고 합니다. 과부는 고개도 못 든 채 사라졌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가난한 과부가 ‘어느 누구보다도 더 많은 돈을 넣은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넣은 것이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씀이 과부에 대한 칭찬으로 이해되시는지요?
저는 과부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부자들에 대한 비판으로 들립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가치관으로 보면, 헌금을 많이 한 부자들이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성경이 보여주는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면 부자들은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은 돈에 대한 태도가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 6:21,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마태 6:24,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는 없다. 한 편을 미워하고 다른 편을 사랑하거나 한 편을 존중하고 다른 편을 업신여기게 된다. 너희는 하느님과 재물을 아울러 섬길 수 없다." 이 말씀은 어제 루가복음 16장 13절과 같습니다.
우리가 매주 드리는 감사성찬례의 봉헌기도가 이 가르침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기에 우리가 받은 것을 하느님께 바칩니다. 주여 이것을 당신의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게 하소서.”
이 기도는 다윗 왕이 성전을 건축하고자 필요한 재정을 준비할 때 온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에서 우러나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여 재정이 넘치도록 채워짐에 감사하며 고백한 말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역대기상 29:12, 14, “12 부귀영화는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통치자이십니다. 힘과 용맹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 하느님께서 힘을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높아질 수 없습니다. ... 14 이 몸이 무엇이며, 이 몸이 거느린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렇듯이 기쁜 마음으로 바칠 힘을 주셨습니까?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기에 하느님 손에서 받은 것을 바쳤을 따름입니다.”
이런 성경말씀들을 통해 예수님이 지니신 재물에 관한 관점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재물은 하느님의 것이다. 사람은 다만 청지기일 뿐이다.” 이렇게 정의하니까 이 말씀인 연상됩니다. “토지는 하느님의 것이다.”
어제 복음을 보면 하느님은 사람들의 마음보를 아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유심히 부자들을 보니까 헌금하는 부자들의 마음보가 순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부자들은 율법을 준수하고 이 정도는 바쳐야 인정받고 존경받으니까 돈의 일부를 낸 것뿐입니다. 내꺼 내가 내고 싶은 만큼만 내면서 체면치레 하는 겁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지난 금요일 복음말씀을 이해해 봅니다. 루가 16장 1-8절 말씀입니다. 어떤 부자가 청지기를 데리고 있었는데 청지기가 낭비한다는 말을 듣고 불러 해고를 통보합니다. 청지기는 자기 앞날을 도모하는 차원에서 자기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 빚을 50%, 20% 탕감해 줍니다. 그런데 이것을 알게 된 주인은 청지기를 혼내지 않고 오히려 칭찬합니다. 자본주의 가치관에 젖어 있는 우리는 도대체 이해하기 힘든 말씀입니다. 청지기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청지기는 재산을 관리하는 책임을 지닌 사람입니다. 청지기가 처음에는 낭비했다고 합니다. 자기만족과 자기 유익만을 위해서 맡겨진 재물을 사용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후에는 빚진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권한을 사용했습니다. 청지기의 임무를 바로 수행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땅의 모든 사람을 청지기로 세우셨습니다.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라.” 피조세계를 잘 관리하는 사명을 맡은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은 그 본연의 사명을 자신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청지기로 여깁니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실상 다 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자녀, 재정, 시간, 부동산, 자연, 나 자신, 등등 모든 것이 주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 땅에 유익을 위해, 구체적으로 하느님 나라를 세우도록 내게 맡겨주신 것입니다. 청지기의 사명은 잘 관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주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실까? 주님의 뜻과 마음은 어떤 것일까? 기도하며 맡겨진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합니다.
재물을 어떻게 사용하는가가 신앙의 진정성을 알아보는 기준입니다. 특히 헌금은 내가 청지기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인지를 스스로 확인하게 해 주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요한 웨슬리 신부님은 ‘마지막 회개는 지갑에서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헌금을 어느 정도해야 하냐는 기준을 놓고 말이 많습니다. 흔히 십일조를 최소한의 기준으로 제시합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는 신정일체 이스라엘에서나 통용되는 율법으로 신약에서는 폐기되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각자도 헌금을 드리는 기준이 있을 것입니다. 예수원 설립자 故대천덕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으니 나의 모든 것이 다 주님의 것입니다. 십의 십이 기준입니다.”
성공회 형제교회 신자회장을 오래 하셨고 서울교구 평신도의장도 하셨던 원로 한 분이 몇 년 전 평신도선교대회에 오셔서 하신 말씀이 기억납니다. “여러분 성공회 사랑하시죠? 성공회가 성장하기 원하시죠? 우리 교회가 배로 성장하기 원하면 십의 2조를 하십시오. 3배로 성장하기 원하시면 십의 3조를 하십시오.” 제가 그분의 삶을 좀 압니다. 스스로가 청지기로 신실하게 살아가니까 이렇게 도전적인 말씀을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사랑으로, 형편 가운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예물을 드리며 성찬례 봉헌 기도가 여러분 자신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청지기로 우뚝 서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청지기로 살지 않는 부자들에 대한 비판은 성전을 중심으로 한 종교지도자들에 대한 분노로 이어집니다. 오늘의 복음 본문과 앞뒤 문맥을 잘 읽어보면, 생활비를 다 바칠 정도로 헌금한 그녀의 아름다운 행위 뒤에는 그렇게 헌금하도록 과부를 끌어들인 당대의 종교지도자들의 타락이 있었음을 보게 됩니다.
헌금하는 장면이 담긴 본문 앞에 나오는 말씀이 이렇습니다. 38-40, “예수께서는 가르치시면서 이런 말씀도 하셨다. ‘율법학자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은 기다란 예복을 걸치고 나다니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회당에서는 가장 높은 자리를 찾으며 잔칫집에 가면 제일 윗자리에 앉으려 한다. 또한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오래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만큼 더 엄한 벌을 받을 것이다.’"
헌금이야기 뒤에는 성전 파괴 예언이 나옵니다. 마르코 13:2, “예수께서는 ‘지금은 저 웅장한 건물들이 보이겠지만 그러나 저 돌들이 어느 하나도 제자리에 그대로 얹혀 있지 못하고 다 무너지고 말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문맥이 이렇습니다.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는 율법학자, 생활비 전부를 성전에 바치는 과부, 그리고 그런 헌금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성전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겨지지 않고 무너지리라는 말씀.
이런 문맥으로 볼 때 오늘 복음은 과부의 가산을 등쳐먹는 종교 지도자들의 탐욕에 희생된 과부의 헌금으로 화려하게 꾸며진 부를 자랑하는 성전을 심판하는 내용이 됩니다.
앞서 11장을 보면, 예루살렘이 올라오신 예수님은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에 대하여 분노하셨습니다. 마르코 11: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성서에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버렸구나!’ 하고 나무라셨다.”
자신들과 결탁하여 이루어지는 장사치들의 매매로부터 이익을 챙겨온 성전 종교 특권층 대한 단죄였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서 성전이 멸망의 대상임을 보여 주신 것이었습니다. 마르코 11: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한 뒤, 예수께서는 성전 뜰 안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사고팔고 하는 사람들을 쫓아내시며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셨다.”
오늘의 과부는 강도의 소굴에 전 재산을 바친 셈입니다. 엘리야에게 모든 것을 바침으로 가뭄을 이겨내는 축복을 받은 시렙다 과부의 이야기를 기억하며 과부는 자기 생활비를 모두 헌금했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순수한 동기 뒤에는 아낌없이 바쳐서라도 하느님의 물질의 축복을 받아 내야 한다고 가르치는 종교 지도자들의 감춰진 탐욕이 있습니다.
마지막 한 푼까지 바치게 하는 율법교사들의 가르침으로 말미암아 강도들은 더 부유해지고 그들의 소굴은 날로 화려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순전한 과부는 그 희생양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교회가 이런 문제로 내홍을 겪고 사회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
이상의 이해로 볼 때, “다른 사람들은 다 넉넉한데서 얼마씩 넣었지만, 과부는 구차하면서도 있는 것을 다 털어 넣었으니 생활비를 모두 바친 셈이다.”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과부의 행동에 대한 칭찬이 아닙니다. 과부를 착취하고 자기 배를 불리는 종교인들에 대한 분노입니다.
예수님의 이 분노는 이 땅에 하느님의 성전이 회복을 되기를 바라시는 주님의 열정으로 이어집니다. 이 메시지는 다음 주일 복음이 성전파괴 예언이기에 다음 주일에 이어서 설교 하겠습니다.
오늘 2독서 히브리서의 말씀처럼,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온전히 희생 제물로 봉헌하셨습니다. 우리를 위해서 전부를 주신 놀라운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감사하는 진정한 믿음은 주님의 몸인 교회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하여 청지기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럴 때 초대교회처럼 공동체 안에 궁핍한 자가 없는 교회가 되고, 세상으로 나가 선교정신 3번째, “사랑의 섬김으로 이웃의 필요에 응답합니다.”는 말씀을 실천하는 선교적인 교회가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 땅의 모든 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어 교회를 통해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가 드러나고 확장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헌금을 드리시나요?
신앙은 청지기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말씀/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두 개의 나라 (0) | 2018.11.26 |
---|---|
하느님 나라를 살아가는 구심점, 성전! (0) | 2018.11.18 |
감사하는 삶, 하느님 나라에 가까운 삶! (0) | 2018.11.04 |
바르티매오에게 믿음을 배우다 (0) | 2018.10.28 |
야고보와 요한의 삶 (0) | 2018.10.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