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2일 (김장환 엘리야 신부)
일과 쉼의 균형, 쉼의 본질!
살인적인 무더위가 계속 되고 있습니다. 이런 때 진짜 시원한 숲속 계곡에서 쉼을 갖는 피서가 필요합니다. 벌써 10여명의 교우들이 여름휴가와 방학으로 외유 중에 있습니다. 건강하게 지내시다 안전하게 돌아오시기를 기도합니다. 지난 금-토 50대 어머님들의 수련회도 잘 다녀오셨습니다.
오늘 복음이 속한 6장의 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12제자들을 불러 전도여행을 보내십니다. “열두 제자를 불러 더러운 악령을 제어하는 권세를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셨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돌아와 예수님께 보고합니다. 마르코 6:30, “사도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 제자들의 전도여행에 큰 성과가 있었나 봅니다. 그러니까 낱낱이 보고 하는 것이죠.
이 제자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르코 6:31,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하고 말씀하셨다. 찾아오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음식을 먹을 겨를조차 없었던 것이다.”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삶에 반드시 필요한 것이 쉼입니다. 일과 쉼의 균형이 필요합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오래 많이 일하기로 유명합니다. OECD 국가 중에 장시간 노동 3위로 독일 + 4개월입니다. 선진국은 벌써 주 40시간, 36시간에 돌입했는데, 주 52시간이 결정되니까 반발도 심합니다.
2-3년 전에 들은 얘기인데 팩트체크는 안된 겁니다만, 알카이다가 한국에 외국인근로자로 잠입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사장이 하도 초과근무를 많이 시켜서 테러를 모의할 회합을 가질 수 없었다고 합니다. 더군다나 임금까지 주지 않아 항의했더니 불법체류자라고 신고해서 추방됐다는 겁니다. 장시간의 노동이 테러를 방지하는 혁혁한 공로를 세운 거니 장시간 노동이 당연하다고 하는 사람은 없겠지요?
그 동안에는 새벽에 출근해서 밤늦게 퇴근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 수고로 이만큼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자녀와 함께 보내는 시간’ 48분, OECD 최단시간. ‘아빠와 아이의 교감 시간’ 고작 6분. ‘내 건강상태 양호라는 생각’ 비율도 최저입니다. 과로와 스트레스로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병들고 신음하고 있습니다. 어거스틴 형제가 쓰러진 원인도 과로입니다.
적당하게 일하고 적당하게 쉬는 삶의 균형을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다만 더 많이 일을 해야만 소득이 보장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문제는 정부와 기업이 지혜를 모아 개선해 가야 하는 국가적 과제로 쩨데카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다시 오늘 복음을 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을 알아보고는 여러 동네에서 모두 달려 나와 예수님의 일행보다 앞서 가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배에서 내려 보니 군중이 모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오병이어 기적이야기를 보면 남자만도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님 앞에 모여들었던 것입니다.
이들에 대해 오늘 복음은 ”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 앞에 나온 군중들은 나라를 잃은 식민지 백성들입니다. 삶의 기반인 토지도 없습니다. 일자리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삶의 소망, 살아가는 이유, 의미가 없습니다. 자존감도 없고 마음과 육체에 병들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저 인생이라는 고해에 던져져서 먹고 마시는 것을 해결해 가는 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인 사람들입니다. 당시 갈릴리 백성들이 대부분 이러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게을러서 가난하게 된다.’고 말하곤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1독서로 읽은 예레미야 23장을 보십시오. 1절, “이 저주받을 것들아, 양떼를 죽이고 흩뜨러 버리는 목자라는 것들아. 2절, 내 양떼를 돌보아야 할 너희가 도리어 흩뜨려서 헤메게 하니...”
예레미야는 남유다가 멸망할 시기에 활동했던 예언자였습니다. 여기서 목자는 종교적인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신정일치 사회인 이스라엘에서 왕과 정치지도자들을 말합니다. 이스라엘의 목자로 세워진 지도자들이 미슈파트와 쩨다크를 행하지 않음으로 남유다는 심판을 받습니다. 바벨론의 침공을 받아 멸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예수님 당대에는 로마의 식민지로 살아갔습니다.
예수님은 자신 앞에 나오는 군중을 바라보셨습니다. 마르코 6: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여기서 “보다”는 단어는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주목하여 보는 것’으로 ‘존중한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쉼을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아 떠나온 예수의 일행을 쫒아온 군중들입니다. 예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을 귀찮아하거나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아니 환대하셨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찾아 이렇게 모여 있는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의 필요를 이해하셨고 그들을 존귀하게 대하셨습니다. 몸과 마음을 치유하여 주시고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어 하느님의 나라를 비전을 품게 하셨습니다. 하느님 나라 백성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게 하는 모든 묶임을 끊어내어 존귀한 하느님의 자녀로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을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이라고 합니다.
본문 53절 이후의 기록을 보면, 이런 예수님의 이런 모습이 계속 이어집니다. 예수님의 일행은 다시 쉼을 갖기 위해서 베싸이다라는 곳으로 배를 타고 가셨는데, 중간에 풍랑을 만나는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겐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이르게 되셨습니다.
그곳에서도 예수님의 일행을 알아본 동네 사람들이 모두 다 예수님 앞에 병자들을 데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환대하시는 예수님은 치유하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있는 곳에는 하느님 나라가 임하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들을 향한 예수님의 환대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마르코 6:34, “예수께서 배에서 내려 군중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을 보시고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그들을 측은히 여기시어”
예수님의 이 마음을 ‘측은지심’이라고 합니다. 이 때 사용된 헬라어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단어는 ‘창자’를 뜻하는 ‘스플랑크논’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창자는 가장 깊은 마음이 머무는 자리라고 합니다. ‘애간장이 녹는다.’ 말할 때 ‘애’가 창자입니다. 영어로 컴패션. “함께 아파하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을 쫒아 다니는 허다한 무리들, 병들고 지치고 자존감을 잃어버린 사람들을 향한 예수님의 마음은 애태움 그 자체입니다. 이 시간 이 자리 주님 앞에 나온 여러분을 향한 주님의 마음도 이것입니다. 이 시대, 이 땅의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마음이 이것입니다.
주님의 이 마음을 묵상하면서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는 예수님의 말씀이 그저 쉬자는 제안으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피정으로의 초대’로 들려왔습니다. 피세정념避世靜念, 피정이란 일상에서 잠시 물러나 조용한 곳에서 침묵과 기도로 주님 안에서 새로워지는 시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바쁘고 피곤한 사역 중에도 한적한 곳, 주로 올리브 산으로 물러나시어 “늘 하시던 대로”, 어떤 때로 새벽에, 또 밤을 새기도 하시며 아버지와 함께 하시는 시간을 가지셨습니다. 피정을 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과 쉼, 사역과 기도의 균형을 가르쳐 주시고자, 피정의 은총을 맛보게 하시고자 “따로 한적한 곳으로 가서 함께 좀 쉬자” 하신 것입니다. 피정의 은총이란 하느님 나라 운동, 삶과 사역의 중심이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피정을 통해 하느님의 마음, 헤세드를 충만히 채우는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은 의무적으로 피정에 참여합니다. 대림절기가 시작되기 전에 피정을 하는데, 주님 안에서 쉼을 가지며 1년의 사역을 돌아보고 새로운 일 년을 섬길 힘을 얻는 시간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으로 채워 목자의 마음으로 회복하는 겁니다.
이 피정은 일상의 삶으로 확장됩니다. 매일매일 성무일과를 드리고 주어진 사목을 감당합니다. 성무일과가 하루의 피정입니다. 기도를 통해 주님과 교제하며 사역의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내려놓고 힘을 얻습니다. 사제에게 성무일과는 특권이고 은총입니다.
사제에게만 일까요? 오늘 서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심으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가까워진”(에페 2:13), “성령을 받아 아버지께 가까이 가게 된”(에페 2:18) 모든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아닐까요?
예수님이 늘 하시던 대로 한적한 곳에 나가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기도와 피정을 시간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으로 충만하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목자 없는 양과 같은 군중들을 측은히 바라보시며 환대하셨습니다.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고 고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핵심은 바로 아버지와 함께 보내는 시간, 기도, 예배, 피정입니다.
제자들을 불러 전도여행을 보내시면서 자신이 전개하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제자들에게 훈련시키신 예수님은 부활 후 승천하시면서 지상대명령으로 위임하셨습니다. 마태 28:19-20.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의 사명은 시대 가운데, 하느님 나라 전도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헤세드로 환대하며 하나되어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외치는 것입니다.
오늘 서신은 주님 안에서 서로 상종하지 않았던 유다인과 이방인이 하나되는 교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초대교회 신자들 안에 충만했던 헤세드의 능력을 보게 합니다.
이 시대에 하느님 나라 운동을 전개해야 하는 우리 교회를 돌아봅니다. 오늘날 교회는 나와 다르다고 정죄하고 배제하며 차별의 담을 높이 쌓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 복음이 주는 기쁨과 환대, 섬김의 능력이 부족합니다. 헤세드가 약합니다.
미슈파트, 쩨데카를 실천하는 힘의 근원이 바로 헤세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요청되는 것이 피정입니다. 너무 세상의 일속에만 치우쳐 있습니다. 일상 속에서 기도와 예배가 생명입니다.
‘따로 한적한 곳’, 골방입니다. ‘함께 쉬자’, 주님과 함께 교제하는 기도입니다. 이것이 우리는 상반기에 주요사업으로 침묵기도학교를 한 이유입니다.
‘따로 한적한 곳’, 성당입니다. ‘함께 쉬자’, ‘ 주님의 임재 가운데 공동체가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이 주일감사성찬예배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생명이고 특권이 되는 이유입니다.
휴가 시즌입니다. 여행은 생각만 해도 설레 입니다. 쉼과 회복이 있는 좋은 휴가를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반기에는 무엇보다 주님 안에서 쉬는 은총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내면을 평화와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기도와 예배, 피정의 특권을 누리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 안에서 쉬는 거룩한 습관으로 일과 쉼의 균형을 이루어, 건강한 일상을 살아가며, 하느님 나라의 복음 선포해 가는 우리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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