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는 오늘날 8백만의 성공회 신자가 있는 나라로서 전 세계 성공회 신자 열 명 중 한 사람은 우간다인입니다. 이 우간다, 나아가 전 세계 복음주의자와 성령운동파 사람들이 기억하는 전도자가 페스토 키벤제레입니다. 우간다에 성공회 선교사들이 처음 들어간 것은 1877년의 일입니다. 들어가자마자 신앙의 박해를 받아 1885년에는 세 명의 소년(11세가 최연소, 15세가 최연장)이 화형을 당하는 것을 필두로 제임스 해닝턴(James Hannington) 주교도 순교합니다. 이 세 소년이 불을 두려워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본 어른 40여 명이 그날로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합니다. 우간다의 첫 그리스도인 순교자로서 이 세 소년의 기념비가 캄팔라 근교에 있다고 합니다. 1887년 우간다 선교 10주년에는 100여 명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런데 순교자들 대다수가 세 소년의 마을 출신이었다고 합니다. 순교는 그야말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바꿀 수 없는 진리에 대한 증언입니다. 한국의 초기 순교자들처럼 이 우간다의 순교자들도 막 믿기 시작한 순수한 이들로 신학적 지식도 거의 없고 성경을 겨우 읽을 줄 아는 정도였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고 합니다.
희한하게도 20세기 초는 여러 지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한국에서도 1907년 평양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거니와 그에 앞서 1904년 영국의 웨일스 부흥, 1905년 인도 라마바이의 묵티 부흥,1906년 미국 아주사 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1906-7년에 대부흥운동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페스토 키벤제레에게 영향을 준 신앙운동은 1930년대에 시작되었다고 하는 발로콜레(Balokole. “구원받은 자”라는 뜻)운동입니다. 이 운동은 동아프리카의 우간다, 탄자니아, 케냐, 르완다, 부룬디 등지에서 일어나서 “동아프리카 부흥운동”으로도 알려집니다. 18, 19세기 복음주의 부흥운동의 맥을 잇는 운동이면서도 동시에 아프리카 현지인들이 주도한 운동이기도 합니다. 신학적으로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근본주의 운동이라 할 수 있고 매우 엄한 청교도적 윤리로 아프리카의 문화적 가치를 혁신했기 때문에 다분히 성공회 영성의 한 맥이라 할 수 있는 청교도 유산의 재등장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성공회는 일곱 빛깔 무지개 교회”라는 강연과 글에서 성공회 영성에는 고전적-가톨릭-청교도-복음주의-성령운동-앵글로가톨릭-자유주의라는 단층이 통합-혼재되어 있다는 얘기를 한 바 있습니다.) 여러 아내를 거느릴 뿐만 아니라 아내를 무슨 노예처럼 다루는 아프리카 문화에서 키벤제레는 동등한 배우자 관계를 설교하고 아내에게 잘못을 사과할 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재우는 여성역할까지 마다하지 않았다고 하지요. 여하튼 성공회 복음주의의 아프리카 선교 성공, 동아프리카 부흥운동의 특징 등은 오늘날 성공회의 수적 다수라 할 아프리카 성공회를 이해하는 데 중요합니다.
그런데 발로콜레 운동의 출발점은 1929년 9월 22일 흑인 그리스도인 지도자 시므온 은시밤비(Simeon Nsibambi)가 백인 의사 조 처지(Joe Church)를 만나 함께 성령충만을 기도한 것이라고 합니다. 개인의 회심과 금주, 정직함, 엄격한 윤리와 용서를 강조하는 이 운동, 청교도 윤리와 복음주의 영성이 20세기 초 성령운동의 발흥을 타고 등장하는 이 운동은 주로 성공회 교회들을 중심으로 번져가지만 다른 교파들에게도 무척 큰 영향을 줍니다. 어떻게 보면 오늘날 세계성공회 내의 갈등은 이 청교도-복음주의-성령운동으로 이어지는 영성과 가톨릭-앵글로가톨릭-자유주의 진영의 영성과 빚는 갈등, 엘리자베스 1세가 성공회로 통합하려고 애쓴 청교도와 가톨릭의 후예들이 분열하는 걸로도 비칩니다. 이 갈등은 좀 더 소규모, 국지적으로 한 교구, 교회 내에서도 등장할 수 있습니다. 성공회는 출발점부터가 이 갈등과 긴장의 양극관계를 끌어안는 것이었는데 구심과 균형을 잃으면 이 양극이 분열적으로 되살아날 수 있는 교회가 또한 성공회인 것 같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처음부터 갈등과 긴장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갈 용의를 갖는 것이 성공회 영성의 한 특징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페스토 키벤제레 얘기로 다시 돌아오면, 그는 열 살 때 세례를 받긴 했지만 전혀 신앙적인 생활과는 거리가 멀었고 전도자가 되는 건 더구나 꿈도 꾸지 않았던 인물입니다. 낮에는 교사로, 밤에는 본인 표현으로 “심각한 죄인으로 살며 하느님과 멀어지려 애쓰는” 삶을 살았습니다. 미션스쿨의 교사다보니 마지못해 주일에 교회는 나갔지만 동아프리카 부흥운동의 영성에 절은 설교자와 신자들은 늘 회심체험과 간증을 말합니다. 키벤제레는 이런 신자들을 “광신자”라 부르며 싫어했습니다. 훗날 그는 자기 인생이 머리는 크고 밑은 가느다란 팽이 같아서 팽이가 계속 돌지 않으면 서 있을 수 없듯 일하고 놀고-먹고-마시고-자는 쳇바퀴를 반복하는 인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런 그가 1941년 10월의 어느 날 늘 그렇듯 교회 뒷자리에 앉아 있는데(분위기가 불편하면 내빼려고) 조카가 이틀 전 주님께서 자기에게 삼촌이 주님께 돌아올 것이라 하셨다며 회중 앞에 나와 간증할 것을 요구합니다. 당황한 키벤제레는 화가 나서 교회를 나와 버립니다. 그리고 술을 마시러 가는데 친구인 동료교사가 따라와서 “세 시간 전에 나는 주님과 만났다네” 하면서 자신이 잘못한 세 가지를 용서해달라고 청합니다. 키벤제레는 집으로 돌아와 침대 곁에서 무릎을 꿇습니다. “제가 너무 멀리 간 것이 아니라면 저를 도와주십시오!” 그런데 마치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이 눈앞에 서계신 체험을 하며 키벤제레는 자기 죄가 그분을 못 박았음을 깨닫습니다.
회심한 이후에도 키벤제레는 교사생활을 계속하지만 완전히 다른 생활을 보입니다. 그리고 성서 이야기를 열정과 유머를 뒤섞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자신들의 이야기처럼 느끼게 하는 재능이 있어 평신도 설교자로도 이름을 얻습니다. 그리고 자기 죄와 잘못, 약점에 대해서도 솔직한 면모를 보입니다. 그는 가정 기도모임과 성경공부를 조직하는 일, 가끔 부흥운동 내에서 다툼이 일어나면 화해케 하는 일, 그리고 너무 율법적으로 남을 정죄하는 사람들을 자기 경험을 들어 겸손히 달래는 일에 열심을 냅니다. 평신도로서 자기 사역을 그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키벤제레는 1961년부터는 풀타임으로 전도사역에 헌신하려고 교사직을 그만두고 남아공의 백인사역자 마이클 캐시디(Michael Cassidy)와 동역합니다. 인종과 국가, 교파간의 장벽을 넘어 함께 사역하고 전도하는 그런 운동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1967년 성공회 성직자로 서품을 받은 이유는 성공회 교회들에 이 부훙운동의 불길을 전하기 용이하리란 매우 실용적인 판단에서였습니다. 훗날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면서 빌리 그래함이나 월드비전 같은 곳에서 함께 일하자는 초대를 받지만 거절하고 성공회 성직자로서 부흥운동을 계속합니다.
1971년 회교신자인 이디 아민이 쿠데타를 일으켜 오보테 정권을 전복시켰을 때 처음에는 신앙의 자유와 국민선거를 약속했습니다. 수도 캄팔라에 시민들이 쏟아져 나와 춤을 추며 기뻐했지만 1972년 탄자니아의 침공을 받으면서 이디 아민은 변질되기 시작합니다. 비록 탄자니아군은 몰아냈지만 아민은 점점 사람을 믿지 못하고 잔인한 독재자가 되어갑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면서 탄압하고 지도자들을 공개처형합니다. 1977년 아민은 성공회 주교들을 불러 모읍니다. 1972년부터 키게지(Kigezi)의 주교가 된 키벤제레는 이 모임에 가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날 모임이 끝나고 모든 주교들이 귀가했는데 대주교 자나니 르움(Janani Luwum)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음날 아민 정부는 대주교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기사를 냅니다. 하지만 사진은 2주 전의 어느 교통사고 사진이었습니다. 캄팔라 성공회대성당에서는 시신도 없는 대주교의 장례식이 치러지는데 정부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4천5백 명의 신자들이 운집합니다. 그러나 요주의인물로 정부의 감시를 받던 키벤제레는 그 장례식에 오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권유로 장례식 당일에 고산지대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국경을 넘어 르완다로 탈출한 것입니다.
마지못해 우간다를 탈출한 그날부터 이디 아민이 쿠데타로 축출되는 1979년까지의 2년 동안 키벤제레는 동아프리카 부흥운동과 박해에도 굴하지 않는 우간다 성공회의 이야기를 전 세계에 전합니다. 그래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원하면 타국에서 생활할 수도 있었지만 아민이 물러나자 다른 피신했던 성공회 주교들과 엉망이 된 우간다로 돌아옵니다. 그때부터 생을 마감하는 1988년까지 9년 동안 화해운동을 벌이며 고국 재건에 헌신합니다. 그는 이런 말을 합니다. “영적해방의 심장은 예수님, 죽었다가 부활하시고 자기 백성을 다스리시는 그분에게 있습니다. 그런데 영적자유는 여러분과 나를 인간이게 하는 다른 면들을 무시하고 영적차원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나의 전체 즉 한 인간으로서 나의 권리, 존엄성, 소유, 안전, 자유를 다 망라하면서 얻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정치사회적 해방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습니다. 더 큰 역동이 필요하니 곧 그리스도를 설교해야만 참된 자유는 일어납니다.” 대단히 보수적이고 심지어 근본주의적이라 해야 할 동아프리카 부흥운동의 기수에게서조차 성공회 영성의 성육신적 특성, 전인적 선교이해는 엿보입니다. 영적차원에만 관심을 갖는 보수신앙을 가졌다고 해서 인간의 존엄성을 해치는 사회경제적 차원의 외면, 거꾸로 그 차원의 행동이 전부라는 행동주의의 병폐가 이 성공회 전도자에게는 보이지 않는 점이 새삼스럽습니다. (이주엽 신부)
'말씀/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존 웨스터호프의 성공회 신앙의 이해 1_ 서론 (0) | 2011.07.18 |
---|---|
성공회의 전통 (0) | 2011.04.30 |
성공회 인물시리즈 : 매들린 렝글(Madeleine L'engle 1918-2007): 이야기꾼 (0) | 2011.02.14 |
성공회 인물시리즈 : 버너 도지어(Verna J. Dozier 1917~2006): 평신도 선교를 재정의해 준 여성 (0) | 2011.02.14 |
성공회 인물시리즈 : C. S. 루이스(C. S. Lewis 1898-1963): 순전한 그리스도인 (0) | 2011.02.14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