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말씀/설교

영원한 생명의 양식

by 분당교회 2018. 8. 14.

2018 8 12 연중 19주일 주일감사성찬례 설교문

최성모 요한 신부 

 

하느님, 오직 주님만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시나이다. 비오니, 우리가 세상의 헛된 만족에서 벗어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의 양식으로 살게 하소서.

 

열왕상 19:4-8

자기는 하룻길을 여행하여 거친 들로 나갔다. 싸리나무 덤불이 있는 곳에 이르러 아래 앉은 그는 죽여달라고 기도하였다. “, 야훼여, 이제 끝났습니다. 저의 목숨을 거두어주십시오. 선조들보다 나을 없는 못난 놈입니다.” 그리고 나서 엘리야는 싸리나무 덤불 아래 그대로 누워 잠들었다. 그때 하늘의 천사가 나타나 흔들어 깨우면서 일어나서 먹어라하고 말하였다. 엘리야가 깨어보니 머리맡에, 불에 달군 돌에 구워낸 과자와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음식을 먹고 물도 마셨다. 그리고는 다시 누워 잠이 들었다. 야훼의 천사가 다시 와서 그를 흔들어 깨우면서 길이 고될 터이니 일어나서 먹어라하고 말하였다. 엘리야는 일어나서 먹고 마셨다. 그는 음식을 먹고 힘을 얻어 사십 일을 밤낮으로 걸어 하느님의 호렙에 이르렀다.

 

시편 34:1-8

어떤 일이 있어도 야훼를 찬양하리라. 주를 찬양하는 노래 입에서 그칠 날이 없으리라. 나의 자랑, 야훼께 있으니 비천한 자들아, 듣고 기뻐하여라. 나와 함께 야훼, 높으시도다노래 부르자. 모두 소리 맞춰 이름을 기리자. 야훼 찾아 호소할 들어주시고 몸서리처지는 곤경에서 건져주셨다. 그를 쳐다보는 , 얼굴 빛나고 부끄러운 당하지 아니하리라. 가엾은 자의 부르짖음을 야훼, 들으시고 곤경에서 건져주셨다. 야훼의 천사가 경외하는 자들 둘레에서 진을 치고 그들을 구해주셨다. 너희는 야훼의 어지심을 맛들이고 깨달아라. 그에게 피신하는 자는 복되다.

 

에페 4:25-5:2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지 말고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몸의 지체들입니다. 화나는 일이 있더라도 죄를 짓지 마십시오. 때까지 화를 풀지 않으면 됩니다.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지 마십시오. 도둑질하던 사람은 이제부터 그런 짓을 그만두고 손으로 일하여 떳떳하게 살며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남을 해치는 말은 밖에도 내지 마십시오. 오히려 기회 있는 대로 남에게 이로운 말을 하여 도움을 주고 듣는 사람에게 기쁨을 주도록 하십시오. 마지막 날에 여러분을 해방하여 하느님의 백성으로 삼으실 것을 보증해주신 하느님의 성령을 슬프게 하여드리지 마십시오.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 소리와 욕설 따위는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버리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너그럽고 따뜻하게 대해 주며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여러분을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서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답게 하느님을 닮으십시오. 그리스도를 본받아 여러분은 사랑의 생활을 하십시오. 그리스도꼐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셔서 하느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희생제물이 되셨습니다.



요한 6:35,41-51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이때 유다인들은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못마땅해서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아니, 사람은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닌가? 그의 부모도 우리가 알고 있는 터인데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왔다니 말이 되는가?” 말을 들으시고 예수께서는 무엇이 그렇게 못마땅하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내게 없다. 그리고 내게 오는 사람은 마지막 날에 내가 살릴 것이다. 예언서에 그들은 모두 하느님의 가르침을 받을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로 온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를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이밖에는 아버지를 사람이 없다. 정말 들어두어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 나는 생명의 빵이다. 너희의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도 죽었지만 하늘에서 내려온 빵을 먹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다. 빵을 먹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원히 것이다. 내가 빵은 나의 살이다. 세상은 그것으로 생명을 얻게 것이다하고 말씀하셨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눕니다.

 

하느님의 선지자 엘리야의 이름을 처음 듣는다고 하시는 분은 이곳에 계실 거라 생각합니다. 분당교회 관할사제 신부님의 신명이 엘리야이기도 하고요. 열왕기에는 엘리야에 대한 이야기가 신비롭고 다채롭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엘리야는 지금으로부터 대략 2,900 사람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남쪽의 유다왕국과 북쪽의 이스라엘왕국으로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중 북쪽에 있는 이스라엘왕국에서 활동하던 선지자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왕국의 왕은 아합이었는데, 열왕기를 기록한 저자는 그를 이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선대의 어느 이스라엘 왕들보다도 가장 많이 야훼 하느님의 속을 썩인 사람

 

그도 그럴 것이 아합은 이방인 여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이세벨의 종교, 바알 신앙마저 받아들였습니다. 아합은 이스라엘왕국의 수도인 사마리아에 바알 신당을 짓고 바알 신을 위한 제단을 세웠습니다. 이방인들의 입에서 모든 신들의 어머니로 일컬어지는 아세라 여신의 목상도 왕국 곳곳에 세웠습니다. 이런 아합을 향해 하느님의 선지자 엘리야는 야훼의 말씀을 선포하고, 바알의 예언자들과의 대결을 제안합니다.

 

불병거를 타고 승천하는 엘리야(Elijah taken up in a chariot of fire)ㅣ쥐세페 안젤리(Giuseppe Angeli)ㅣ1740-55ㅣOil on canvasㅣ워싱턴국립미술관(National Gallery of Art, Washington)


그렇게 가르멜 산에서 하느님의 선지자 엘리야와 바알의 예언자 450명의 대결이 펼쳐집니다. 각자 섬기는 신을 위한 제단 위에 소를 마리씩 잡아 제사를 지내고 어떤 신이 응답하는지 붙어보자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대결을 제안한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어느 분이 진짜 살아계시는 신인지, 야훼인지 바알인지를 똑똑히 알게 하는 , 그래서 오직 야훼만을 하느님으로 섬기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누가 대결에서 이겼을까요? 맞습니다. 엘리야입니다. 바알 신의 제단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야훼 하느님의 제단은 하늘에서 내려온 불길로 모두 타버렸습니다. 제단 위의 제물을 불로 태우고 연기를 하늘로 올리는 제사의 방법을 번제라고 합니다. 그리고 신은 연기를 흠향함으로써 제사를 받아들입니다. 열왕기에 기록된 표현대로라면, 바알 신은 자신을 위한 제사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했지만, 야훼 하느님은 미적미적한 반응 정도가 아닙니다. 당신을 위한 제사의 모든 역할을 하셨습니다.  제단 위의 번제물에 불을 붙이신 분도 야훼 하느님이시고, 연기를 흠향하신 분도 야훼 하느님이십니다. 그렇게 왕국에 당신이 살아계신 하느님이심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지만 사건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가, 성서에 쓰인 글자 그대로 ,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구나, 하느님께서 수많은 사람들 앞에 당신의 권능을 드러내 보이셨구나이런 놀라움에만 멈춰서는 됩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수많은 적들 앞에 나선 엘리야의 바람처럼, 열왕기의 저자가 사건을 이토록 놀랍게 기록한데에는, 어느 분이 진짜 신이고, 무엇이 가짜 -우상인지를 아주 단호하고도 확실하게 선포하고자 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일로 엘리야는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왕국에서 야훼의 제단을 허물고, 바알 신과 아세라 여신의 신당으로 채우려 했던 이세벨이니, 450명이나 되는 자신의 예언자들이 엘리야와의 대결에서 지고, 죽임까지 당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서 무서운 살기와 독기를 품는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엘리야는 두려움에 떨면서 살기 위해 급히 도망칩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엘리야는 바알이 가짜 , 우상임을 밝히고, 야훼만이 유일한 하느님이심을 왕국에 드러내 보여준 능력자였지만, 한순간 도망자의 신세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느님께서 당신의 크신 권능을 만민에게 보여주셨는데, 이세벨은 그런 하느님을 두려워하며 떨기는 커녕, 그분의 선지자 엘리야를 죽이려고 듭니다. 이런 이야기 전개가 쉽게 납득이 되시나요?

 

앞서 신비로운 기적에 대한 놀라움에만 멈춰서는 된다고 말씀드린 이유가 바로 이때문입니다. 하느님 께서 엘리야를 통해 사렙다 과부의 죽은 아들을 다시 살리시고, 번제물만이 아니라 제단마저 모두 불태워버리신 기적은 사실 믿어도 그만, 믿어도 그만인 일입니다.

 

기적이란, 하느님께서 엘리야를 인도하시는 여정 가운데 보여주시고 나타내실 그분의 , 계획, 목적, 그것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일 뿐입니다. 기적은 목적 자체가 없을 뿐더러, 어떤 문제의 해결이 수도 없습니다. 사실 이것이 성서에 나온 모든 기적의 기능이자 의미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이제, 오늘 우리가 함께 읽고 들은 열왕기에서의 엘리야의 모습, 마음 상태를 이해할 있습니다. 엘리야는 이세벨과 아합을 포함해 자신을 죽이려는 모든 사람을 해치워 달라고 하느님께 빌지 않습니다. 바알의 수많은 예언자들 앞에 섰던 당당함은 어느새 사라져 보이지 않고, 싸리나무 덤불 아래 주저앉아 차라리 마음 편하게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입니다. 얼마나 탈진했던지 자리에 잠들어버린 엘리야를 다시 깨운 하느님의 천사였습니다.

 

하느님의 천사는 엘리야에게 먹으라며, 불에 달군 돌로 구워낸 과자와 병을 내놓습니다. 기력이   다했던 엘리야는 번에 걸쳐 음식과 물을 먹고 마시고서야 다시 힘을 되찾을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40 밤낮을 꼬박 걸어 하느님의 호렙에 이르렀다고 열왕기는 쓰고 있습니다.

 


수많은 기적의 선지자라고 할만큼 엘리야에게는 이렇게 또다시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릿 개울에 숨어지낼 때에는 까마귀가 음식을 날라다 주었고, 광야로 도망쳐 절망과 탈진에 빠져있으니 천사가 도움을 줍니다. 만약 제가 엘리야였다면, 저에게 일어나는 이런 기적들 앞에서 꽤나 우쭐해졌을 것입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시고, 이토록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그분의 힘과 지혜가 마치 것인양 호기를 부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하느님의 살아계심을 믿었고, 그분의 권능을 몸소 체험했으며, 그런 크신 분이 자신과 함께하심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분의 힘을 자기 힘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그분의 뜻을 자기 뜻으로 왜곡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엘리야는 자기에게 일어나는 이런 기적들의 의미를 아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든 기적은 엘리야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게 하려 하시는 , 그래서 엘리야로 하여금 하느님께서 계획하신대로 목적을 이루시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모든 기적은 엘리야가 겪는 여러 어려움-궁핍함, 슬픔, 두려움, 죽음에 대한 공포에 이르기까지, 그중 어느 하나라도 해결해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어려움을 지나 다른 어려움으로, 힘들고 괴로운 어려움으로 이끄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바로 그런 기적을 징검다리 삼아, 호렙산으로 이어지는 기나긴 여정을 지나게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글로 말로 짧은 시간 엘리야의 여정을 되돌아보는 너무나 쉽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견뎌내고 참아야만 했던 어려움과 두려움이 크게 와닿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가 너무나 쉽게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만 멈추고 싶은 욕망 말입니다. 이집트에서 노예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의 인도에 따라 그곳을 빠져나올 , 그리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까지 광야에서 생활을 , 그들이 너무나 쉽게, 그리고 수없이 드러냈던 바로 욕망 말입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들은 어려움과 두려움 앞에서 차라리 노예살이가 나았다고 불평불만을 쏟아냈습니다. 신실하신 하느님께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그들로 하여금 주인으로 살게 하리라고 약속하셨음에도, 그들은 그들이 걷고 있는 여정의 여러 어려움과 두려움 앞에 그만 멈춰 돌아가기를 바랐습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매번 크나큰 기적으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셨으며, 죽음에서 구해주셨음에도, 그들은 그분의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그만 멈춰서, 오직 자기들의 배를 채울 만나, 자기들의 욕심을 채울 기적만을 바라고 구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가장 편하기 때문이죠. 

 

엘리야는 그만 멈추고 싶은 욕망과 싸웠습니다. 자신을 쫓아오는 죽음의 공포보다도 삶을 짓누르는 궁핍함을 조금이나마 벗어나 누릴 있었던, 사렙다에서의 소소한 일상, 바로 시간, 그곳에 멈추고 싶은 욕망. 수많은 이방인들, 등돌린 동족들 앞에서 적들과 싸워 이겼을 때에, 이것으로 이제 그만 모든 해결되었으면 하는 바람. 순간마다에 일어났던 기적을 붙잡아 매달리고 싶은 욕망 말입니다.

 

너무나 어려운 일이지만, 엘리야처럼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욕망과 싸워야만 합니다. ‘나에게 오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다름아닌 싸움에 대한 당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기나긴 여정, 신앙의 길로에 초대입니다.

 

그러니, 주님의 집으로 축성한 성당에 나왔다는 것으로, 그것도 일주일에 겨우 한번으로 초대에 응답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를 받고 견진을 받아 주님의 몸이라는 교회에 교적을 두는 것으로 예수님의 당부에 저는 할만큼 했습니다, 말할 있는 것도 아닙니다. 나는 몇날 며칠에 구원을 받았노라고 떠벌리는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 당부, 초대에 응답하여 수행 완료했다고 자랑할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교회가 성당을 축성하는 것은, 이집트와 같은 세상 속에 살면서도 성당이 가리키고자 하는 거룩한 약속의 , 하느님 나라를 잊지 않기 위함입니다. 그러한 지향 때문에 별볼일 없이 초라한 지점이 거룩하게 됩니다. 우리가 분란과 불신으로 하나를 이루지 못하면서도 교회의 이름으로 모이는 것은, 그러함에도 혼자서는 도무지 없는 아주 지난한 여정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앞에 선다는 ,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것은 이처럼, 순간이 아닌 영원의 문제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다고 약속하신 생명의 ,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있는 빵이며, 먹으면 영원히 있다는 , 예수 그리스도의 ,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바로 빵을 도대체 언제 어디서 받아 먹을 있겠습니까? 우리의 마음이 땅에 붙잡혀 있고, 우리의 생각이 순간에 매여있는데, 영원을 향하는 여정 자체인 빵을 도대체 언제 어디서 어떻게 받아 먹었다고 말할 있겠습니까?

 


혹여나 빵이 만나가 아닌지 곰곰히 생각해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이 가야할 여정을 망각한 , 자리에 멈춰서 바랐던 교만과 태만의 만나를, 우리 역시 바라고 있지는 않는지 곰곰히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함께 모여 나누는 거룩한 성체와 보혈마저도 우리의 마음이, 우리의 생각이 그러하다면 결국 그런 만나가 되고 맙니다. 만나를 부적처럼 모시는 꼴이 되고 맙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성체와 보혈은, 천사가 엘리야에게 건넸던 구운 과자와 물처럼, 우리의 몸과 마음에 힘을 불어넣어, 하느님을 향해, 하느님 나라를 향해 밤낮으로 꾸준히 영원히 나아가게 하는 참된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거룩한 양식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주님의 몸이 오늘도 깨어지고 찢어짐을 기억한다면, 모든 것에 감사하게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종국에 그분과 하나가 되는 여정에 서있으며, 길을 가기 위해 거룩한 양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모든 것에 또한 겸손하게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걷고 있습니다. 우리의 걸음을 멈춰서는 안됩니다. 다른 이의 걸음을 멈추게 해서도 안됩니다. 사도들과 성인들의 신앙의 권면을 가슴에 품고서 하루 하루를 잊지 말고 걸어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는 언제나 당신의 목적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하느님께 맡길 일입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댓글